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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23] 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의 관군의 연합작전! 1차 금산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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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7월 9일, 고경명은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앞세워 적진을 돌파하려 했는데 오히려 역습을 당해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고경명이 직접 북을 치며 싸움을 독려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진작되어 일본군은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습니다.
후퇴한 일본군은 토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 모습을 본 고경명은 성밖의 관사를 불태운 뒤 포를 쏘니 성 내부까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드라마 대조영 중에서)


그러자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나와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고경명의 의병이 사면에서 공격하자 큰 피해를 입고 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곽영의 관군은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구축한 토성은 견고해서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고경명은 잠시 후퇴하였습니다. 

 


이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고경명에게 다음날 다시 힘을 합쳐 싸우자고 했고, 고경명의 맏아들 고종후 역시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했으니 승세를 유지한 채 기회를 보아 다시 적을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라고 말했으나 고경명

 

"네가 부자간의 정의로써 내가 죽을까봐 두려워하느냐?
나는 국가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책이다."

 

라고 답했습니다.

고경명 영정



7월 10일, 고경명곽영의 군대와 함께 다시 금산성 공격에 나섰고, 고경명은 전날과 같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내보내 적진을 돌파하려 했는데 기병이 적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일본군이 진을 비우고 곽영의 관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전투 의지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관군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곽영의 부하 장수 김성헌이 도망갔고, 남아있던 병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 사기가 떨어져 곽영의 진이 바람에 휩쓸리듯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때 고경명은 밀려드는 일본군을 막아내기 위해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는 

 

"방어사(곽영)의 진이 무너졌다!"

 

라고 외치자 의병들도 그 말을 듣고는 동요하여 고경명의 진도 황급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성헌 때문에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조선군

 

상주 전투임진강 방어선 때와 마찬가지로 전장에서는 누구 하나라도 진을 이탈하거나 소문을 들은 것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렇게 의병이 수세에 몰리자 부하들이 고경명에게 몸을 피할 것을 청했으나 고경명

 

"내가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끝까지 싸웠고, 고경명의 종사 유팽로는 진이 무너질 때 전장을 벗어나 목숨을 건졌으나 고경명이 전장에 남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전장으로 들어가 고경명을 보필하여 전투에 임하였습니다.

1차 금산 전투 기록화


이렇게 유팽로를 다시 만난 고경명은 자신은 살아서 나갈 수 없으니 몸을 피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유팽로는  

 

"제가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라고 말하며 고경명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고경명선생비(출처 : 문화재청)

 


고경명이 전사하자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가 최전방에서 남은 의병을 지휘했으나 끝내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금산 전투 이후 인근의 백성들은 고경명의 패전 소식을 듣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우리들은 이제 죽었다."

 

라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판에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통곡하는 장면(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고경명이 거느렸던 의병의 규모가 컸고, 백성들의 기대 또한 컸으니 실패에 따른 절망도 클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1차 금산 전투고경명의 의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연합하여 금산성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1차 금산 전투가 끝난 지 40여 일이 지난 후에야 고경명의 아들인 고종후가 비로소 고경명의 시체를
찾아냈는데 그동안 무더위와 비 때문에 많이 부패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고경명의 얼굴빛은 마치 산 사람
같아서 보는 사람마다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고경명의 묘(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또한, 당시 의주까지 피난 가 있던 선조는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고경명을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로 임명하였고,

 

"그대(고경명, *김천일)들이 하루바삐 도성(한양)을 회복하여 내가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라고 교서를 내렸는데 교서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고경명은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김천일 : 임진왜란 당시 전직 관료이자 의병장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함


이후 1차 금산 전투의 소식을 들은 선조는 고경명을 애도하며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호남의 유생들이 포충사를 세워 고경명과 그의 아들인 고종후고인후 그리고 1차 금산 전투에 함께 참전한 유팽로와 안영을 배향하였습니다.

전남 광주에 위치한 포충사(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 시간에는 웅치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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