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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by 역사채우기 2021.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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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어갈 때쯤 종횡무진 활약했던 동복현감 황진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후송되었고, 의병장 황박마저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 진영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성채로 뛰어들어오니 그동안 잘싸웠던 조선군에게 위기가 닥쳐 전황은 다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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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전투 백병전(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그러자 전투를 총지휘하던 광주목사 권율이 직접 칼을 빼들고 뒤를 보이는 병사들을 베어버렸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병을 베면서 전투를 독려하니 조선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가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전장에 위기가 닥쳤을 때 지휘관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권율 장군 영정

 


이렇게 1차로 5월의 정암진 전투, 2차로 7월에 벌어진 웅치 전투와 안덕원 전투 그리고 *이치 전투 덕분에 고바야카와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어 전라도 진출에 고배를 마시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이치 전투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여 언제 벌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는 과정에서 관군과 의병이 서로 힘을 합해 일본군을 막아냄으로써 후방이 안정되어 이순신의 수군이 해상 작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연전연승 중인 수군이 아니더라도 육군도 단병접전에 강한 일본군에 더는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적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덤으로, 호남지방(전라도)곡창지대였으므로 군량 조달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거점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초반, 순식간에 조선군 진영이 무너지면서 일본군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었던 전황이 차츰 균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평야 사진(식량 자원은 평소에도 중요하고 전시에는 더 중요하다)

 

만약 이치와 웅치가 뚫리고 전주성까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다면 전라도가 충청도와 경상도처럼 적의 손에 유린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조선 수군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입니다.

 

 

이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은 이치 전투임진왜란3대 전투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중요시 했으며, 권율의 사위였던 이항복이치 전투 덕분에 일본군이 다시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를 근본으로 국가의 안전이 보장됨으로써 물자와 군량의 공급이 끊기거나 모자라지 않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치 전투를 총지휘했던 권율은 후일 참전하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보다도 이 전투를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치대첩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세간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행주대첩) 제일의 공으로 삼는데, 전라도 이치에서의 전공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이치 전투 당시에는 적의 기세는 한창 높았고, 우리 군사는 단약한데다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믿고 의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열 배나 많은 적군을 막아 호남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행주에서의 전투는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던 일이라 호남의 정병과 맹장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이 넘었고 지리 또한 험하였으며, 적병의 수는 이치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공을 세우기 쉬웠던 이유이다.

이항복 [백사집]에 수록된 권율의 증언




다음 시간에는 우척현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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