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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37] 빼앗긴 성을 돌려받으러 왔다! 영천성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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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4월 22일에는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의해 경북 영천이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영천성은 영천 군수 김윤국이 지켜야 했으나 일본군이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면서 성은 그대로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무혈입성하였습니다.

 


| 영천성 탈환 작전과 창의정용군

일본군은 영천성에 1천여 명을 남겨둔 채 본대는 그대로 북진했는데 남아있던 일본군이 약탈을 자행하자 백성들은 분개하였고, 4월 27일, 영천 지역에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권응수를 대장으로 추대한 뒤 영천성 탈환을 위한 작전을 전개합니다.

* 권응수 : 경북 영천 출신으로, 경상좌수사 박홍의 부하였으나 박홍이 전함을 자침시키고 도망치자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권응수 장군 초상화

 


그 일환으로 5월 6일, 신녕현 한천에서 일본군 13명을 사살하였고, 7월 14일에는 신녕현 박연에서 매복 공격으로 일본군 37명을 사살하면서 보급로 차단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24일에는 군위로 향하던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격퇴하였습니다. (겁림원 전투) 


이로써 영천 의병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듯 올라갔고, 일본군은 위의 전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급로가 차단된 채 완전히 고립된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에 영천성 탈환을 위한 사전 작업이 완료되었다고 판단한 영천 의병은 인근에 흩어져있던 관군과 의병을 영천성 남쪽의 주남들에 집결시키자 그 수는 4천여 명에 달했으며, 군기와 군율을 확립한 뒤 그들 스스로를 '창의정용군'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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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하는 의병(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 영천성 전투

7월 26일, 권응수와 창의정용군은 영천성을 사방으로 포위한 뒤 경상좌병사 박진이 지원해준 화약 무기와 영천 지역의 계절풍을 이용하여 화공으로 공성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자 화살과 포탄이 바람을 타고 빗발치듯 일본군 진영으로 쏟아져 내렸고, 일본군은 조총으로 응사하려 했으나 바람이 강하게 불어 조준과 장전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지형과 지세를 활용한 전략이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은 바람과도 싸워야 했는데 창의정용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에 그대로 밀릴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성문이 열렸습니다.

이때 권응수가 앞장서서 도끼를 들고 성문을 돌파하자 뒤따르던 의병들이 사기가 올라 수많은 적을 베면서 성이 완전히 함락되었고, 영천성은 3개월 만에 조선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권응수 장군의 장검(출처 : ko.wikipedia.org)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영천성 전투입니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여 일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이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경상좌병사)이 별장인 주부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영천성을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들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가 용약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 [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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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전도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4천 병력 중 83명이 전사하고, 238명이 부상당했으나 일본군 수백을 사살했으며, 포로로 잡혀있던 백성 1,090여 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말 200필, 조총 및 창검 900여 자루를 노획하는 등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일본군은 경주로 후퇴하였으며, 영천성이 수복됨으로써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당한 경상 좌도의 일본군은 상주로 후퇴하였습니다.

더욱이 영천성 전투의 가장 큰 의의는 기존에는 조선군이 일본군의 공격에 방어하던 입장이었으나 이번 전투를 계기로 성을 탈환하는 작전도 펼 수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주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례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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