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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39] 의병, 관군, 승병의 연합작전! 청주성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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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 3일, 일본 제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에 의해 청주성이 함락되면서 청주 방어사 이옥은 도망쳤고, 청주성은 하치스카 이에마사라는 장수가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후 7월 15일, 승려 영규가 이끄는 승병 1천여 명이 청주성 탈환을 위해 청주성 서문 쪽에 있는 빙고현(모충동 고개)에 주둔하였고, 7월 29일에는 청주성이 점령된 후 연기군(현재 세종특별자치시)으로 피해있던 청주 방어사 이옥과 공주 목사 허욱의 군대 500여 명이 청주로 진출하여 영규의 승병과 합류하였습니다.

승려 영규의 초상화



이들은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피해만 입고 탈환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때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금산을 수복하려 했으나 *1차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이 전사하면서 청주성 탈환으로 계획을 수정합니다.

 

1차 금산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5

 

[임진왜란23] 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의 관군의 연합작전! 1차 금산 전투

마침내 7월 9일, 고경명은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앞세워 적진을 돌파하려 했는데 오히려 역습을 당해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고경명이 직접 북을 치며 싸움을 독려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진

historicalhistory.tistory.com



같은 날인 7월 29일, 청주성에서 15리 떨어진 안심사에는 청주성 탈환에 실패한 관군과 승병이 주둔해 있었는데 조헌의 의병이 합류하자 이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습니다.

청주 안심사 대웅전(출처 : ko.wikipedia.org)



이렇게 관군과 의병, 승병의 총지휘를 맡은 의병장 조헌은 청주성 탈환을 위한 작전을 세웠고, 8월 1일 새벽, 청주성을 재차 공격합니다.

관군, 의병, 승병 연합군이 청주성 서문과 남문을 향해 몰려오자 적장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성문을 열고 나와 교전하려 했습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출처 : 위키백과)

 


하지만 성 밖으로 나온 일본군은 조선군에 패하여 쫓기고 말았고, 조선군은 기세를 몰아 성벽에 사다리를 걸치고 공성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청주읍성도(출처 : 청주시청)



성 위에서는 일본군이 총탄을, 성 아래에서는 조선군이 화살을 빗발치듯 쏘면서 8월 1일 내내 전투가 지속될 정도로 양측은 매우 치열하게 싸웠으나 기상악화로 인해 조선군이 공격을 중단하고 서쪽 야산으로 잠시 후퇴하였습니다.  

 

이때 조헌

 

"승패는 천운에 달려 있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

 

라며 탄식하고는 전열을 재정비하며 방어사 이옥에게 일본군이 철수할 수 있으니 청주성 북문에 복병을 배치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옥은 복병을 배치하지 않았고, 이날 밤, 피해가 막심하여 전투 의지를 상실한 일본군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한 뒤 불을 피우고, 성루에 깃발을 세워 군대가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는 북문으로 빠져나가 모두 철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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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성 탈환도 민족기록화

 


같은 시각, 조선군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여전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8월 2일 새벽, 조선군은 청주성을 재차 공격하였으나 성은 텅 비어 있었고, 창고에는 곡식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군량도 챙기지 못할 만큼 다급했던 일본군

이를 보고 청주 방어사 이옥은 일본군이 다시 성을 공격해온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곡식을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패잔병을 놓치고, 군량도 태워버린 이옥

이렇게 전투는 종료되었고, 조선군은 청주성 탈환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전투를 총지휘한 의병장 조헌은 종4품 *봉상시 첨정으로, 승려 영규는 당상관(정3품 이상의 품계)으로 승진하였습니다.
* 봉상시 : 종묘와 제향의 일을 관장하는 관청

조헌 표준영정


한편, 충청좌도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청주성 전투의 소식을 듣고는 모두 달아났습니다.

일본군은 청주성을 호남 지역과 충청우도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로 삼았으나 조선군이 다시 탈환하면서 차후의 진로에 차질을 빚게 되었고, 나아가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도 진격해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1차 경주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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