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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40] 천년의 수도 경주를 탈환하라! 1차 경주성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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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성 함락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동래, 언양, 울산을 거쳐 경주로 향했습니다.

일본군 진군로(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이때 경주성 방어의 책임자인 경주 부윤이 윤인함에서 변응성으로 교체되었는데 윤인함은 변응성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해 버렸습니다. 
윤인함 : 인수인계는 모르겠고 일단 살고 보자


결국 경주성은 경주 부윤이 없는 상황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었고, 경주 부윤을 대신해서 판관 박의장과 장기현감 이수일이 군사와 백성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주성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일본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모두 도망갔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빨리 도망간 사람이나 나중에 도망간 사람이나 다를 것 없다

이렇게 경주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아무도 없었고, 일본군이 무혈입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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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성에 무혈입성하는 일본군

 

 


| 1차 경주성 전투

시간이 흘러 1592년 8월, 경상좌병사 박진은 군사를 모아 경주성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박진 장군(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우선, *영천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의병장 권응수와 정세아가 이끄는 의병 5천여 명을 불러 자신의 휘하에 두었고, 박진이 거느린 5천여 명의 관군을 합쳐 1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영천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9

 

[임진왜란37] 빼앗긴 성을 돌려받으러 왔다! 영천성 전투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4월 22일에는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의해 경북 영천이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영천성은 영천 군수 김윤국이 지켜야 했으나 일본군이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제는 관군과 의병이 연합 작전을 펼치는 일이 자주 보입니다. 
각자의 의견 차이가 있겠지만 나라를 구하는 일이고, 서로 목적이 같으니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지요. 

 


8월 20일, 박진은 의병장 권응수와 판관 박의장을 선봉으로 삼아 경주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경주읍성 야경(출처 : 경주시청)

 


그렇게 공성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무렵, 언양(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부근에 있던 일본군이 북문으로 나와 조선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의 협공을 받자 병력을 둘로 나누어 대항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공성 위력이 떨어진 데다가 군사들의 피해가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전황이 조선 측에 점차 불리해지자 박진은 퇴각 신호를 보냈습니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경주성 탈환에 실패하였고, 600여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조선군은 안강(현재의 경주시 안강읍)으로 패주했으나 박진은 포기하지 않고 신무기(?)까지 도입하며 경주성 공격을 재차 준비합니다.

 

 

아래는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1차 경주성 전투에 대한 내용입니다.

박진이 16고을의 군사 1만여 명을 합쳐서 의병장 권응수로 선봉을 삼고 곧장 경주의 적에게 육박하였다.
그러나 적이 먼저 길 아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전투가 한창 어우러졌을 때 뒤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관군이 크게 패하여 전사한 자들이 즐비하였으며, 박진 등은 도망하여 들어왔다.

 

 

 

다음 시간에 제2차 경주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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