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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45] 적의 본진에서 벌어진 양측의 총력전! 부산포해전

by 역사채우기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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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포 해전

8월 29일에서 9월 1일 사이의 *6차례 해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부산포로 진입하기 전 적의 기선을 완전히 제압한 조선 수군은 *장사진을 펼쳐 부산진 포구로 진입하였습니다.

* 장림포, 화준구미, 서평포, 다대포, 절영도, 초량목 해전
* 장사진 : 함대를 뱀처럼 길게 늘어세우는 진법

장사진을 펼친 조선 수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당시 부산포에 정박해 있던 적선은 무려 470여 척으로, 지금까지 이순신이 물리친 적선의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부산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카쓰, 한산도에서 무참피 패했으나 용인 전투에서는 1,600명으로 8만의 조선군을 패퇴시킨 와키자카 야스하루, 일본 센코쿠 시대에서 해전으로 이름을 날린 구키 요시타카, 그리고 도도 다카토라까지 쟁쟁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카쓰 빼고는 모두 이순신에게 아무것도 못했다

 

그러니 당시 일본군이 부산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산포 일본군 진영(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하지만 일본군은 지금까지 이순신과 상대하면서 별 피해도 못 준 채로 매번 박살이 났던 경험이 있었고, 자신의 본진에서 170여 척이나 되는 조선 수군의 위세를 보고는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에 조선 수군이 거침없이 진격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산 언덕에 구축해놓은 진지에 숨어서 조총과 활, 그리고 조선군에게 노획한 화포를 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일본군 : 여기가 무너지면 더이상 갈 곳이 없다.

 

장사진을 펼쳐 적선을 공격하는 조선 수군(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 여기서 일본군이 해전을 피한 이유는 매번 패배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한산도 대첩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 금지령을 내려 '조선 수군을 보면 도망가라'라고 명령했던 것도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고지대를 선점한 상태에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수많은 화포를 발사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지형상 매우 불리한 여건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으나 이순신은 비장의 무기인 거북선을 선봉으로 내세워 적의 공격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고, 그 뒤에서 판옥선이 천자총통, 지자총통, 장군전, 피령전, 장편전 등을 발사하여 정박 중인 적선을 무참히 깨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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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에 전시된 부산포해전 모형



전투는 9월 1일 내내 지속될 정도로 양측은 모든 전력을 집중하였고, 그 결과 조선군은 적선 470여 척 중 128척을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이순신이 지금까지 싸운 해전 중에서 가장 큰 성과였을 뿐만 아니라 적의 본진을 기습했기 때문에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부산진성을 목전에 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남은 350여 척의 적선을 더 공격하지도, 상륙하여 부산 점령을 시도하지도 못했습니다.

 

 


| 이순신이 부산을 점령하지 못한 이유

이순신이 이와 같은 판단을 내린 이유는 부산포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6명이 전사했고, 25명이 부상을 당했으니 적의 피해에 비한다면 큰 피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전라좌수군에서 줄곧 선봉 역할을 했으며,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장수 중 하나인 녹도만호 정운이 조총에 맞아 전사한 일이 큰 타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다.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으로써 한 번 죽음에 아쉬워 할 이유가 없으나, 오직 그대에 관련해서는 마음이 아프도다.
- 이순신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 중 일부

녹도만호 정운

 

 

그리고 일본군은 해전을 피하는 대신 해안 거점을 요새화하는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에 본진이었던 부산은 더욱 방어에 유리하게 진지를 꾸려놓았을 것이고, 단병접전에 있어서는 조선군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해전을 치르기 이전에도 몇 차례의 해전을 치렀고 부산포에서는 하루 종일 수많은 적을 상대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매우 지친 상태에 있었고, 격군들 역시 부산까지 노를 젓느라 휴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은 부산을 점령하지 못했고, 128척의 적선을 격침시킨 것과 부산까지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에 만족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한편, 일본군은 부산포 해전을 계기로 해안 방어에 더욱 집중하여 해안 거점에 왜성을 쌓아 조선 수군의 해상 작전을 방해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서생포왜성(출처 : 문화재청)



현대에는 부산포해전승리를 기념하여 부산포해전이 벌어진 음력 9월 1일을 양력 10월 5일로 환산하여, 이 날을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연안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댓글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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