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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53] 진주대첩(3) 일본군을 물리친 모쿠소 호간

by 역사채우기 2021.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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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10월 6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공방전은 며칠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있는 의병이 배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진주성 함락에 매번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병력의 우세함을 앞세워 부대를 나누어서 의병을 향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일본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하지만 이 전략은 전력을 집중시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진주성 외곽의 의병들은 의병장 김준민 등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이에 의병과 진주성의 군사들은 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에 사기가 한껏 올라갔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전략이 먹혀들지 않자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패를 앞세워 피해를 최소화한 후 그 뒤에서 조총병이 사격하는 동안 보병들이 접근하는 전략을 썼으나 이 역시 진주성 관민의 철벽 방어 덕분에 실패하게 됩니다.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패(드라마 징비록 중에서)



그래도 일본군은 전라도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진주성을 꼭 함락시켜야 했기에 한 가지 꾀를 냈습니다. 

10월 9일 밤, 일본군은 진영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은 후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 하였습니다.

진주성의 군사들과 외곽의 의병 부대들이 추격해온다면 역습을 가할 것이고, 추격해오지 않는다고 해도 조선군이 성을 지켜냈다고 안심하고 방심할 때를 노려 공격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포로로 잡혀있던 아이 한 명이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진주성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아이는 조선군에게 지금 일본군은 거짓으로 퇴각하는 척 하는 것이고, 사실은 일본군이 다음 날 새벽에 총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10월 10일, 아이의 말대로 일본군은 진주성에 대한 총공격에 나섰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진주성의 모습


조선군은 지금까지 잘 싸워왔고, 이번 공격만 막아낸다면 성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일본군 역시 이번 공격마저 실패한다면 진주성은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전라도 진출마저 요원해져 앞으로의 전황은 더욱더 어두워질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양측 모두 사활을 걸고 전투에 임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습니다.

진주대첩 민족기록화


일본군의 계속된 공격에 진주성의 외성이 무너졌고, 일본군은 기세를 타고 내성에 들어와 육박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밤까지 계속 이어졌고, 양측의 기세를 표현하듯 날씨도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악조건 속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대혈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시체 안에 숨어있던 일본군이 쏜 총알이 김시민에게 명중했고, 김시민은 곧바로 쓰러져 죽지는 않았으나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조선군 최고지휘관의 총상으로 조선군은 사기 저하와 지휘 체계의 공백으로 위험에 빠졌으나 이를 곤양군수 이광악이 수습하여 전투를 계속 지휘했고, 외곽에 있던 의병 부대들이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니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해를 더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마침내 성을 포기했으며 자신의 피해 규모를 감추기 위해 아군의 시신을 모두 불태우고 퇴각하였습니다.

곤양군수 이광악(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조선군은 김시민의 총상과 그동안의 피해가 컸기에 일본군을 추격하지는 못하고 승리를 자축하였습니다.

조선군은 이렇게 진주성을 지켜냈고, 일본군은 사상자가 1만 명이나 나올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데다가 전라도 진출까지 좌절되었으니 이 전투의 여파가 매우 컸기 때문에 1차 진주성 전투를 임진왜란의 3대 대첩에 포함시켜 진주대첩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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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3대 대첩



게다가 조선은 이순신의 부산포해전으로 적의 본진을 공격했고, 이정암이 연안성 전투로 황해도 연백 평야를 지켜냈으며,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함경도 전역을 탈환했고, 권응수의 영천성 탈환과 박진의 경주성 탈환으로 전황은 조선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주성의 최고지휘관이자 진주대첩의 주역 진주 목사 김시민은 며칠간 사경을 헤매다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김시민을 선무 2등 공신으로 제수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 외에도 김시민을 포함해 여럿 있습니다.

김시민 선무공신 교서(출처 : 위키백과)

 


한편, 일본군은 이 전투로 김시민을 매우 두려워했으며, 진주 목사 김시민의 이름을 '목사'로 듣고 모쿠소(木曽)라 부르며 소설이나 연극에서 일본 장군이 모쿠소를 물리치는 내용을 자주 넣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독산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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