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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54] 쌀로 말을 씻겨라! 독산성 전투

by 역사채우기 2021.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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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한 권율은 공을 인정받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치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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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6

 

[임진왜란24] 이치 전투! 일본군의 전주성 진출을 차단하라

7월 7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웅치(곰티재)를 넘은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본대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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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7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어갈 때쯤 종횡무진 활약했던 동복현감 황진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후송되었고, 의병장 황박마저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동요하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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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2월, 권율은 선거이, *변이중, 조경 등과 함께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하였습니다.

* 변이중이 개발한 화차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의 변이중 화차 부분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31

 

조선의 대량살상무기! 화차

https://youtu.be/d3QZ46JNqqg 이번 시간에는 조선의 대량살상무기 '화차'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377년, 최무선의 화약 개발을 시작으로 화통도감(화약 및 화기 제조를 담당하던 관청)이 설치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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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앞서 전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삼도근왕군에 소속되어 있을 때 성급히 한양으로 진격하다 용인에서 대패했던 경험을 교훈삼아 경기도 오산시에 위치한 독산성(독성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용인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59

 

[임진왜란17] 8만의 군사를 동원한 조선! 반격의 서막이 될 것인가?

| 조선! 개국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 결집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초기에는 일본군에게 패하거나 도주하기 바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한양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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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0

 

[임진왜란18] 조선 최악의 전투! 용인 전투

| 군사 수가 전투의 모든 것은 아니었으니.. 6월 5일의 전투로 삼도근왕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졌고, 이광(전라도순찰사이자 삼도근왕군의 맹주)은 진을 옮기기 전에 지형이 어떤지 탐지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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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뒤 한양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고립시킨 후에 한양을 탈환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권율의 1만 병력이 독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은 일본군에게도 곧바로 전달되었고, 세력이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놓기 위해 2만의 병력을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일본 제8군 선봉장이자 2달 전 진주성에서 크게 패했던 우키타 히데이에였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독산성의 보급로를 모두 차단한 뒤 독산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독산성 동문(출처 : 문화재청)


그러자 권율도 소수 병력을 여러 차례 보내 야습을 감행하여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히니 일본군은 독산성 내에 우물이 없어 식수가 부족하다는 정보를 활용하여 성을 계속 포위한 채 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모두 막아 조선군을 말려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권율이 말을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는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하였고,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본 일본군은 성 내에 식수가 아직 풍족하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권율 장군 영정



게다가 남쪽에서는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의병을 모아 독산성으로 오고 있으며, 북쪽에서는 명나라가 대군을 보낼 것이라는 보고까지 받자 일본군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퇴각하였습니다.
일본군 : 남쪽에서는 의병, 북쪽에서는 명나라라니

하지만 권율은 이를 결코 두고 볼 수 없었고, 물러나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수많은 적을 베어넘기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독산성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경기도 일부까지 회복하였고, 권율이 말을 씻긴 곳을 '세마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마대(출처 : commons.wikimedia.org)




아래는 [선조수정실록]에 수록된 독산성 전투입니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독산성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경성(한양)의 적이 진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하였으나 권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적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하였다.

그러자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니 기내에 주둔했던 적이 모두 경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여러 의병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하여 주둔하면서 중국(명나라) 군사를 기다렸다.
- [선조수정실록]

 

 


다음 시간에는 제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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