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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

[임진왜란97]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by 역사채우기 202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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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첫 번째는 바로 이순신입니다.

이순신 장군 영정



명량해전 직전, 조선 수군은 원균의 칠천량해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부하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이와는 반대로 적의 규모는 너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는 겁에 질려 있었고, 일부 장수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칠천량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3

 

[임진왜란81] 한국사 최악의 해전! 칠천량해전(1)

| 원균의 자업자득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지난 출정으로 적선 10척을 깨트렸으나 판옥선은 그보다 훨씬 많은 32척을 잃으면서 전임 통제사였던 이순신과는 180도 다른 성과를 보여주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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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4

 

[임진왜란82] 칠천량해전(2)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원균의 결단

|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렇지만 원균 휘하에서는 절망뿐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보여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무능한 행보로 많은 군사와 함대를 잃은 조선 수군은 매우 위축되었고, 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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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순신은 어머니의 삼년상을 이유로 복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부임하였고, 사실 부임되기 전부터 이순신은 군사와 군수물자를 모으며 이후의 상황을 대비하는 철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강한 리더쉽과 통솔력으로 단기간에 군사들을 강군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명량대첩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어란포해전벽파진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명량 출정 전날, 부하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각오를 다짐으로써 전투 의지를 분명히 각인시켰습니다.

 

 

어란포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34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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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파진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35

 

[임진왜란93] 13척 vs 13척! 벽파진해전

1597년 8월 18일,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서 12척의 판옥선을 인계받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8월 26일에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합류로 판옥선 1척이 더 확보되어 조선 수군은 13척의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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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명량의 조류와 지형적 특성을 파악하여 전장을 이곳으로 선택한 것도 이순신이었고, 전투 초반, 누가 봐도 질 게 뻔해 보여서 아무도 나서지 않는 와중에 자신의 배 혼자서 수백 척의 함대를 막아내 총사령관으로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죽기로 싸우면 승산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뒤늦게라도 부하들이 전장에 합류하여 반격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명량의 거센 조류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전장 한복판으로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기의 우수성입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은 판옥선이었고, 일본 수군의 주력 전선은 세키부네였고, 아다케부네(안택선)가 일부 있었습니다.

거북선이 있었다면 화력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칠천량해전 때 거북선 3척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판옥선은 화포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전선이 화포를 1문 내지 2문을 탑재할 수 있었던 것을 비교해보면 조선 수군이 병력은 매우 열세였지만 화력에서는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 판옥선



또한, 명량대첩에서 사용된 현자총통지자총통은 사거리가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 월등히 길었으므로 일본군은 근접전이 불가피했고, 접근하기도 전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자총통

 


다만, 이러한 스펙을 갖추더라도 지휘관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칠천량해전처럼 패할 수밖에 없는 건 분명합니다.

 


| 명량대첩의 결과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패하고, 남원성전주성 등 전라도의 주요 거점이 연이어 함락되었을 때 조선 조정은 피난 논의까지 있었을 정도로 매우 동요했고, 백성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남원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8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 일본군의 전라도 재침공 계획 지난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전 초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결정적 승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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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9

 

[임진왜란87] 남원성전투(2) 전세의 불리함을 딛고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 남원성 전투 8월 13일, 일본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북문,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담당하기로 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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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량대첩의 승리로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출하는 데 실패했으며, 일본 육군 역시 직산 전투에서 패하면서 북진에 실패하면서 일본군은 수륙병진 작전에 또 실패하였고, 이렇게 된 이상 다시 남하하여 그들이 세운 왜성으로 들어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울산왜성(출처 : 역사스페셜)



한편, 조선 수군은 명량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당시에는 아직 전라도 곳곳에 일본군 대병력이 산재해 있었고, 그들이 공격해올 것을 대비해 남해를 돌아 서해안의 당사도-어의도-위도-고군산도로 진영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칠천량해전 이후 흩어져있던 군사와 장수들이 전선까지 이끌고 와 이순신에게 하나둘씩 합류하면서 조선 수군의 전력이 한층 보강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명량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56년,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세워졌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벽파진 푸른 바다여, 너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 곳이 여기더니라.

병든 몸을 이끌고 남은 배 12척을 겨우 거두어 일찍 군수로 임명되었던 진도 땅 벽파진에 이르니, 때는 공(이순신)이 53세 되던 정유년 8월 29일, 이때 조정에서는 공에게 육전을 명했으나 공은 이에 대답하되 신에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고 또 신이 죽지 않았으며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리이다. 하고 그대로 여기 이 바다를 지키셨나니 15일에 진(전라우수영)을 옮기자 바로 그다음 날 큰 싸움이 터져 12척 작은 배로서 330척의 배를 모조리 무찌르니 어허 통쾌할 사 만고에 깊이 빛날 명량대첩이여…"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출처 : 진도군청)

 



다음 시간에 석주관 전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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