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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117

[임진왜란30] 우수한 무기와 탁월한 전략! 안골포 해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73척의 함대를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한산도 대첩) * 73척 중 47척 격침, 12척 나포, 14척은 퇴각 이는 지금까지 치렀던 해전보다 훨씬 더 큰 전과를 이룬 해전이었기에 장수와 병사들 모두 매우 기뻐했고, 승세를 타고 가덕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고 역풍도 크게 불어서 인근에 정박해 있었는데 승리의 여운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안골포에 적선이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 안골포 : 안쪽이 깊은 산골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안골포라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이제 부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2021. 11. 17.
[임진왜란29] 급변하는 전황! 한산도 대첩의 결과와 평가 | 한산도 대첩의 결과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부산을 제외한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하였으며, 이 시기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 제6군의 전라도 진출마저 좌절되면서 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 웅치, 이치, 안덕원, 금산 전투를 치르면서 일본 제6군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곡창지대였던 호남 지방이 보존되면서 전라도가 병참기지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했던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물거품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만나기만 하면 패배하는 일본 수군을 보고 "더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해안에 성을 쌓아 방어에 주력하라" 라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당시 일본.. 2021. 11. 14.
[임진왜란28] 한산도 대첩!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한산도에 펼쳐진 학의 날개 https://youtu.be/htWDDIt-qD8 | 한산도 대첩 7월 8일, 조선 수군은 5~6척의 판옥선이 *견내량으로 진격하여 정박해있던 일본 수군을 향해 화포를 발사했습니다. * 견내량 :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해협 소수의 전선으로 피해를 줌으로써 일본군을 자극하기엔 충분했고, 전공을 세울 욕심에 들떠있던 와키자카는 큰 의심 없이 미끼를 물어 조선 수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함대는 첨저선이었으므로 평저선인 조선의 판옥선에 비해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퇴각하는 판옥선에 빈틈을 주지 않고 따라붙은 후 조총을 쏘며 싸움을 걸었습니다. * 첨저선은 선체의 바닥이 뾰족한 선박으로 저항을 적게 받아 속력이 빠르나 선회하기 어렵고, 화.. 2021. 11. 13.
[임진왜란27] 제해권을 장악하라! 이순신의 3차 출정 | 진군에 제동이 걸린 일본군 1592년 6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를 공격하면서 이치, 웅치, 안덕원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이 펼쳐질 무렵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는 남쪽 바다에서도 전란의 흐름을 바꿀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그동안 옥포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합포ㆍ적진포ㆍ사천ㆍ당포ㆍ당항포ㆍ율포에서 적선을 일방적으로 격침시키며 남해의 제해권을 넓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안도로 진군해있는 일본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제때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가 참전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최후방어선이자 선조가 있는 의주를 목전에 두고도 더는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조선 수군의.. 2021. 11. 12.
[임진왜란26] 영남 3대 의병장의 우척현 전투 | 일본 제6군의 전라도 공격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이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함경도로 진출할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곽재우의 의병에게 정암진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후 이치와 웅치 고개를 넘어서 전주성으로 향하려 했으나 이치는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가로막혀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웅치는 의병장 황박과 정담, 이복남의 관군이 뚫리긴 했으나 웅치에서 살아남은 조선군과 황진의 활약으로 안덕원에서 패배하면서 금산으로 퇴각했고, 거기다 고경명의 의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금산성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고바야카와의 군대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라도 공격.. 2021. 11. 10.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로 기울어갈 때쯤 종횡무진 활약했던 동복현감 황진이 이마에 총탄을 맞아 후송되었고, 의병장 황박마저 전사하면서 조선군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 진영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성채로 뛰어들어오니 그동안 잘싸웠던 조선군에게 위기가 닥쳐 전황은 다시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자 전투를 총지휘하던 광주목사 권율이 직접 칼을 빼들고 뒤를 보이는 병사들을 베어버렸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병을 베면서 전투를 독려하니 조선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가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전장에 위기가 닥쳤을 때 지휘관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1차로 5월의 정암진 전투, 2차로 7월에 벌어진 웅치 전투와 .. 2021. 11. 9.
[임진왜란24] 이치 전투! 일본군의 전주성 진출을 차단하라 7월 7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웅치(곰티재)를 넘은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본대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하나의 고개인 *이치(배티재)로 향했습니다. * 이치 : 현재의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 얼마 후 일본군이 이치로 오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광주목사 권율은 고갯길의 후방에는 화포를 설치하였고, 전방에는 목책을 쌓는 한편, 적이 오는 길목에는 *마름쇠를 깔아두어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 마름쇠 : 적의 침투를 저지 또는 지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방어용 무기이며, 보병이나 말이 밟을 시 치명상을 줄 수 있다. 이때 이치를 수비하던 조선군은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 2021. 11. 8.
[임진왜란23] 고경명의 의병과 곽영의 관군의 연합작전! 1차 금산 전투 마침내 7월 9일, 고경명은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앞세워 적진을 돌파하려 했는데 오히려 역습을 당해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고경명이 직접 북을 치며 싸움을 독려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진작되어 일본군은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습니다. 후퇴한 일본군은 토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고, 이 모습을 본 고경명은 성밖의 관사를 불태운 뒤 포를 쏘니 성 내부까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나와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고경명의 의병이 사면에서 공격하자 큰 피해를 입고 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고 곽영의 관군은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구축한 토성은 견고해서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고경명은 잠시 후퇴하였습니다. 이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고경명에게 ..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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