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임진왜란117 [임진왜란55] 조명연합군의 집중 포화! 제4차 평양성 전투(1) 임진왜란 초반, 물밀 듯이 진군해오는 일본군에 의해 의주까지 밀려난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자국의 국경까지 위협을 받자 요동 부총병 조승훈을 원군으로 파병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원수 김명원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에 실패하였고, 조승훈은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제2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4 [임진왜란32] 조명연합군의 첫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 |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실패 육지에서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고, 바다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에서, 구키.. 2021. 12. 26. [임진왜란54] 쌀로 말을 씻겨라! 독산성 전투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한 권율은 공을 인정받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치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6 [임진왜란24] 이치 전투! 일본군의 전주성 진출을 차단하라 7월 7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웅치(곰티재)를 넘은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본대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하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7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 2021. 12. 23. [임진왜란53] 진주대첩(3) 일본군을 물리친 모쿠소 호간 10월 9일, 10월 6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공방전은 며칠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있는 의병이 배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진주성 함락에 매번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병력의 우세함을 앞세워 부대를 나누어서 의병을 향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전력을 집중시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진주성 외곽의 의병들은 의병장 김준민 등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이에 의병과 진주성의 군사들은 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에 사기가 한껏 올라갔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전략이 먹혀들지 않자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패를 앞세워 피해를 최소화한 후 그 뒤에서 조총병이 사격하는 동안 보병들이 접근하는 전략을 썼으나 이 역시 진주.. 2021. 12. 20. [임진왜란52] 진주대첩(2) 계속되는 혈투 |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분투 10월 4일, 일본군 선발대 1만여 명이 진주성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진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진주성 외곽에서 성을 지원하던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군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유숭인의 군대는 수백에 불과했기 때문에 병력의 차이가 너무나 현저했고, 모두 열심히 싸웠지만, 일본군의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유숭인 역시 휘하의 사천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전사했고, 진주성의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사기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진주성의 총책임자였던 진주목사 김시민은 성 밖의 아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도와줄 수가 없었고, 이는 유숭인의 입성을 막았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10월 6일, 일본군 본대가 진주성에 도착.. 2021. 12. 18. [임진왜란51] 진주대첩(1) 전운이 드리우는 진주성 9월 25일의 노현ㆍ창원성 전투를 모두 승리한 일본군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출하는 관문인 진주성으로 향했습니다. 이 병력은 무려 3만이었으며, 그들을 이끄는 수장은 일본 제8군 선봉장이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그리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 전체의 총대장 역할을 수행하던 우키타 히데이에였습니다. 한편, 진주성은 병사한 진주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김시민이 진주목사로 성을 지키고 있었으며, 앞서 사천ㆍ고성ㆍ진해의 적을 공격하여 무찌른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주성은 김시민의 병력 3,700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군사 100여 명을 합하여 3천 8백의 군사를 그느리고 있었으니 일본군의 군세에 비한다면 매우 열세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 즉, 이중성벽으로 .. 2021. 12. 15. [임진왜란50]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항쟁! 노현ㆍ창원성 전투 | 일본 제3군의 진군 1592년 9월, 일본 제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북쪽의 황해도에서 이정암의 군대와 싸웠고, 남쪽에서는 2만의 병력이 경상도의 완전 점령과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창원으로 진군하였습니다. 이정암의 연안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88 [임진왜란46] 이정암의 황해도 방어 작전! 연안성 전투 5월 18일,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김명원과 한응인이 지키던 임진강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임진강을 건넜습니다. 임진강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당시 창원성을 수비하던 경상우병사 .. 2021. 12. 13. [임진왜란49] 북관대첩(3) 길주성 전투와 함경도 전역 탈환 국세필, 국경인, 정말수 등의 순왜 처단과 6진, 명천 지방을 회복하여 한창 기세를 드높이던 정문부와 의병들은 곧장 길주성으로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이후 정문부는 공성전을 전개하는 대신 앞서 장덕산 전투에서 일본군이 추위에 취약했던 점에 착안하여 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땔감을 구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영동관 책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임명촌을 공격해 노략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굳힌 채 일부 군사를 빼서 노략질하던 일본군 쪽으로 칼끝을 돌렸고, 수급 60두를 취했습니다. 이에 길주성과 책성에 있던 일본군은 감히 성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정문부는 책성도 함께 포위하였습니다. 1593년 1월, 안변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와 책성의 일본군이 고립.. 2021. 12. 12. [임진왜란47] 북관대첩(1) 함경도의 영웅 정문부 해정창 전투와 국경인의 반란으로 함경도 전역을 손에 넣은 가토 기요마사는 여진족을 공격했다가 피해만입고 부하들과 순왜들에게 북쪽 변경 지방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안변으로 내려왔습니다. 해정창 전투, 국경인의 반란, 가토 기요마사의 여진족 공격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6 [임진왜란34]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진출을 막아라! 해정창 전투 | 일본군의 분할 진격과 조선 왕자들의 근왕병 모집 일본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평안도로 진군하였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황해도로 진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 2021. 12. 10. 이전 1 ··· 6 7 8 9 10 11 12 ··· 15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