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임진왜란117 [임진왜란103] 1차 울산성전투(2) 결정적 승리를 놓친 조명연합군의 고사 작전 | 울산성전투 공방전 당시 울산성(도산성)은 일본군이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발전시킨 축성술을 그대로 담았고, 오로지 성의 방어 기능만을 극대화시킨 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외부의 지원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조명연합군의 맹렬한 포격과 압도적인 병력 앞에 무너져내렸고, 특히 대완구에 비격진천뢰를 넣어 발사하자 밀집해있던 일본군이 그대로 즉사하는 등 엄청난 화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맞서 일본군이 고지대에서 성벽을 오르는 조선군과 명나라군을 향해 조총 사격을 가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으나 계속된 공격 끝에 울산성의 외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전투의 향방이 제4차 평양성 전투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었습니다. 4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 2022. 8. 10. [임진왜란102] 1차 울산성전투(1) 두려움에 빠진 적을 교란하라! | 공격목표는 어디인가 육지에서의 직산 전투와 바다에서의 명량 대첩으로 북진이 좌절된 일본군은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려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반대로 철수할 수 없게 되자 남해안에 머물면서 왜성을 쌓고 조명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조명연합군의 명나라 경리 양호와 도원수 권율은 여러 왜성 중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성(도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로 공격목표를 압축했고, 둘 중 어느 곳을 공격할지 논의 중이었습니다. 조명연합군은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기로 하였습니다. 첫째로, 울산은 일본군의 본진인 부산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울산성을 함락시킨다면 일본군의 사기를 한순간에 꺾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 2022. 8. 6. [임진왜란101] 일본군의 기습을 역기습으로 대처한다! 절이도해전 1598년 7월 16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과 그 휘하의 5천 군사가 고금도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합류하였고, 7월 18일,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는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고금도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의 움직임은 사방에 깔린 탐망선에 의해 곧바로 이순신에게 보고되었고, 조선 수군은 적선이 당도하기 전에 고금도와 거금도 사이에 위치한 금당도로 진격하였습니다. 이때 일본 수군이 고금도로 올 수 있는 경로는 소록도와 거금도 사이의 길목을 통과하는 방법, 그리고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의 길목을 통과하는 2가지 길이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은 함대를 이 2곳에 나누어 배치해 일본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7월 19일 새벽, 도도 다카토라의 일본 함대가 거금도와 소록도 사이의 .. 2022. 8. 3. [임진왜란100] 조선 수군의 새로운 전진기지 고금도, 그리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합 | 새로운 진영 고금도, 그리고 해로통행첩 명량대첩의 승리 이후 고군산도까지 진영을 옮겼던 조선 수군은 1598년 2월 17일, 다시 남해 바다로 내려와 고금도(전남 완도군 고군면에 있는 섬)에 진영을 세웠습니다. 기적 같은 승리 소식을 듣고 흩어졌던 군사들과 함선이 다시 모여들었고, 이순신이 계속해서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한 결과 상당수의 군수품을 확보한 데 이어 80여 척에 달하는 판옥선을 보유함으로써 명량에서 승리했음에도 전투를 지속할 여력이 부족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적의 침입에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고, 임진년 때의 한산도처럼 이제는 고금도가 전진기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배를 이용하는 자에게 곡식 1~3섬을 받고 해로통행첩을 발행하여 바.. 2022. 7. 30. [임진왜란99]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사로병진책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1598년 8월 18일,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까지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습니다. 후시미성에서 죽어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대로와 오봉행 앞에서 자신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부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서 떠나는 이 내 몸이여, 나니와(오사카)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곁에 있던 *오대로와 *오봉행은 육지에서 직산 전투의 패배와 바다에서 명량대첩의 패배로 전황이 어렵게 되었음을 알고 지긋지긋하고도 명분없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조선에 있던 일본군 장수들에게 본국으로의 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 오대로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에서 가.. 2022. 7. 27. [임진왜란98] 석주관을 지키기 위한 7의사의 항쟁! 석주관전투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은 군대를 좌군, 우군, 수군,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전라도 진군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당시, 수군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무너뜨렸고,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지휘관으로 있는 좌군은 구례를 거쳐 남원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구례를 지키고 있던 구례현감 이원춘은 5만 6천이나 되는 적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어 남원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로써 8월 7일, 구례가 함락된 데 이어 8월 15일에는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구례현감 이원춘 역시 전사하였습니다. (남원성 전투) 남원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8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 2022. 7. 24. [임진왜란97]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첫 번째는 바로 이순신입니다. 명량해전 직전, 조선 수군은 원균의 칠천량해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부하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이와는 반대로 적의 규모는 너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는 겁에 질려 있었고, 일부 장수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칠천량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3 [임진왜란81] 한국사 최악의 해전! 칠천량해전(1) | 원균의 자업자득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지난 출정으로 적선 10척을 깨트렸으나 판옥선은 그보다 훨씬 많은 32척을 잃으면서 전임 통제사였던 이순신과는 180도 다른 성과.. 2022. 7. 20. [임진왜란96] 명량대첩(3) 조선 수군의 반격 | 조선 수군의 철벽 방어와 뒤바뀌는 전황 조선 수군은 전투 초반, 대장선 1척의 분투에 이어 전투 중반, 이순신, 안위, 김응함의 판옥선 3척이 끝내 적의 공격을 다 막아냈고,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명량에서 역조류까지 견디자 적의 공격이 잠시 주춤해졌습니다. 거기다 산을 찍어누를 기세로 거칠게 흐르던 조류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때맞추어 이순신이 초요기를 올렸을 때도 뒷짐만 지고 있던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을 제외한 나머지 장수들이 드디어 합류하면서 아군의 사기가 높아져 드디어 조선 수군이 반격을 가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만은 아직도 합류하지 않았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멀리서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정오 무렵, 이제는 물살이 반대로 .. 2022. 7. 17. 이전 1 2 3 4 5 6 ··· 15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