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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진왜란117

[임진왜란95] 명량대첩(2)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불리한 순간 명량(울돌목)의 지형적 특성상 333척의 대함대가 한꺼번에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전투선이라 할 수 있는 배는 판옥선 13척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몰려드는 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싸워봐야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앞서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순신의 대장선 1척이 홀로 거센 역조류를 견뎌내면서 순조류를 타고 밀려오는 수백 척의 적선을 향해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등을 발사하며 고군분투하는 세계 해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y4oKSBIgxhs?feature=share 명량대첩 shorts 영상입니다. 이때 이순신이 아닌 다른 장군이 전투를 .. 2022. 7. 13.
[임진왜란94] 1척 vs 333척 극한의 컨트롤! 명량대첩(1) |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재부임 후 치러진 8월 27일의 어란포해전과 9월 7일의 벽파진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소규모 전선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뒤이어 다가올 333척의 대규모 선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어란포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historicalhistory.tistory.com/134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벽파진해전에 대해서는 아.. 2022. 7. 10.
[임진왜란93] 13척 vs 13척! 벽파진해전 1597년 8월 18일,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서 12척의 판옥선을 인계받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8월 26일에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합류로 판옥선 1척이 더 확보되어 조선 수군은 13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8월 27일 새벽, 적선 8척이 접근해오자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아군의 사기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이순신의 진두지휘로 적을 물리쳤습니다. (어란포해전) 그러나 뒤이어 50여 척의 적선이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이순신은 어란포에서 장도로, 8월 29일에는 장도에서 진도 고군면의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겼습니다. | 경상우수사 배설의 탈영 그런데 9월 2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영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배설은 일전에 칠천량해전에서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장.. 2022. 7. 6.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았고,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12척의 전선을 인계받아 비로소 수군이라 할 수 있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이 다시 군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박차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 한 통의 조서를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수군을 권율 휘하의 육군으로 편입시켜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싸우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는 한 줌밖에 없는 군사와 전선으로 어떻게든 일본군에게 수로를 내주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에게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으며, 조선이 바다를 내준다면 일본 수군은.. 2022. 7. 3.
[임진왜란91] 직산 전투(2) 직산 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 | 직산 전투의 평가 [선조실록]에는 직산 전투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독 접반사(중국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던 임시 관직) 장운익이 아뢰기를, 직산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 나가 시살하며 한참 동안 교전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은 30여 급을 베었으며 해 부총(부총병 해생)과 양 참정(참장 양등산)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를 드니, 천안.. 2022. 6. 29.
[임진왜란90] 직산 전투(1) 일본군의 북상과 명군의 남하 | 일본군의 북상과 명군의 남하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일본 우군은 전주에서 일본 좌군과 합류한 후 승세를 타고 공주, 진천을 거쳐 북상하고 있었고, 그중 선봉대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직산(충남 천안시 직산읍)까지 당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다시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자 일부 백성들은 피난을 갔으며, 조정에서는 또다시 파천(수도를 옮김)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평양에 머물던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여러 차례 출병을 간청하였고, 양호는 날랜 기병을 선발하여 부총병 해생을 비롯해 참장 양등산, 유격장 우백영과 파귀 등에게 군사 2천을 보내 남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유격장 파새가 정병 2,000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습니다. | 직산 .. 2022. 6. 26.
[임진왜란89] 황석산성 전투(2) 백사림의 도주와 피로 물든 바위 | 백사림의 도주, 그리고 붕괴 조선군은 높고 험준한 곳을 따라 유리한 지형을 끼고 싸우고 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몰려드는 일본군 정예병을 당해낼 수 없었고, 전황이 점점 조선군에 불리해지자 전임 김해부사 백사림은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빼낸 뒤 자신도 성문을 열고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이 북문을 통해 벌떼같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불리했던 상황에서 성문까지 열리자 황석산성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 성문을 연 백사림과 그 가족이 살아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성문을 열어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군과의 밀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우던 군민들은 쏟아지는 일본군을 보고 동요하여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 2022. 6. 22.
[임진왜란88] 황석산성 전투(1)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 | 일본군의 황석산성 포위 1597년 8월 16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일본 좌군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같은 날,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일본 우군의 73,700명이 황석산성(경남 함양군)에 다다랐습니다. 황석산성은 해발 1,190m의 고지를 따라 쌓은 높이 3m, 둘레 8.9km의 산성이며,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도체찰사 이원익이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했던 곳이고, 이러한 이유로 일본군의 침입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안음현감 곽준은 이원익의 지시에 따라 안음(함양군 안의면), 거창, 함양의 군사와 백성, 그리고 무기와 식량을 모두 황석산성으로 모으고 인근에 청야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 육십령 : 경남 .. 2022.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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