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4 [임진왜란99]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사로병진책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1598년 8월 18일,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까지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습니다. 후시미성에서 죽어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대로와 오봉행 앞에서 자신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부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서 떠나는 이 내 몸이여, 나니와(오사카)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곁에 있던 *오대로와 *오봉행은 육지에서 직산 전투의 패배와 바다에서 명량대첩의 패배로 전황이 어렵게 되었음을 알고 지긋지긋하고도 명분없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조선에 있던 일본군 장수들에게 본국으로의 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 오대로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에서 가.. 2022. 7. 27. [임진왜란98] 석주관을 지키기 위한 7의사의 항쟁! 석주관전투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은 군대를 좌군, 우군, 수군,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전라도 진군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당시, 수군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무너뜨렸고,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지휘관으로 있는 좌군은 구례를 거쳐 남원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구례를 지키고 있던 구례현감 이원춘은 5만 6천이나 되는 적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어 남원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이로써 8월 7일, 구례가 함락된 데 이어 8월 15일에는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구례현감 이원춘 역시 전사하였습니다. (남원성 전투) 남원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8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 2022. 7. 24. [임진왜란97]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첫 번째는 바로 이순신입니다. 명량해전 직전, 조선 수군은 원균의 칠천량해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부하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이와는 반대로 적의 규모는 너무 컸기 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는 겁에 질려 있었고, 일부 장수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칠천량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123 [임진왜란81] 한국사 최악의 해전! 칠천량해전(1) | 원균의 자업자득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지난 출정으로 적선 10척을 깨트렸으나 판옥선은 그보다 훨씬 많은 32척을 잃으면서 전임 통제사였던 이순신과는 180도 다른 성과.. 2022. 7. 20. [임진왜란96] 명량대첩(3) 조선 수군의 반격 | 조선 수군의 철벽 방어와 뒤바뀌는 전황 조선 수군은 전투 초반, 대장선 1척의 분투에 이어 전투 중반, 이순신, 안위, 김응함의 판옥선 3척이 끝내 적의 공격을 다 막아냈고,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명량에서 역조류까지 견디자 적의 공격이 잠시 주춤해졌습니다. 거기다 산을 찍어누를 기세로 거칠게 흐르던 조류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때맞추어 이순신이 초요기를 올렸을 때도 뒷짐만 지고 있던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을 제외한 나머지 장수들이 드디어 합류하면서 아군의 사기가 높아져 드디어 조선 수군이 반격을 가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만은 아직도 합류하지 않았고 전투가 끝날 때까지 멀리서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정오 무렵, 이제는 물살이 반대로 .. 2022. 7. 17. [임진왜란95] 명량대첩(2)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불리한 순간 명량(울돌목)의 지형적 특성상 333척의 대함대가 한꺼번에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전투선이라 할 수 있는 배는 판옥선 13척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몰려드는 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싸워봐야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앞서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순신의 대장선 1척이 홀로 거센 역조류를 견뎌내면서 순조류를 타고 밀려오는 수백 척의 적선을 향해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등을 발사하며 고군분투하는 세계 해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y4oKSBIgxhs?feature=share 명량대첩 shorts 영상입니다. 이때 이순신이 아닌 다른 장군이 전투를 .. 2022. 7. 13. [임진왜란94] 1척 vs 333척 극한의 컨트롤! 명량대첩(1) |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재부임 후 치러진 8월 27일의 어란포해전과 9월 7일의 벽파진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소규모 전선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뒤이어 다가올 333척의 대규모 선단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어란포해전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historicalhistory.tistory.com/134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 historicalhistory.tistory.com 벽파진해전에 대해서는 아.. 2022. 7. 10. [임진왜란93] 13척 vs 13척! 벽파진해전 1597년 8월 18일,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에게서 12척의 판옥선을 인계받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8월 26일에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합류로 판옥선 1척이 더 확보되어 조선 수군은 13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8월 27일 새벽, 적선 8척이 접근해오자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아군의 사기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이순신의 진두지휘로 적을 물리쳤습니다. (어란포해전) 그러나 뒤이어 50여 척의 적선이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이순신은 어란포에서 장도로, 8월 29일에는 장도에서 진도 고군면의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겼습니다. | 경상우수사 배설의 탈영 그런데 9월 2일,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영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배설은 일전에 칠천량해전에서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전장.. 2022. 7. 6. [임진왜란92]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수군을 폐하라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뒤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부임 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보고를 접한 그 날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흩어진 군사와 군수품을 모았고,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12척의 전선을 인계받아 비로소 수군이라 할 수 있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이 다시 군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박차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 한 통의 조서를 받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수군을 권율 휘하의 육군으로 편입시켜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싸우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는 한 줌밖에 없는 군사와 전선으로 어떻게든 일본군에게 수로를 내주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에게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으며, 조선이 바다를 내준다면 일본 수군은.. 2022. 7. 3. 이전 1 ··· 6 7 8 9 10 11 12 ··· 26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