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4

[임진왜란83] 칠천량 해전의 결과와 원균의 생존 여부 | 칠천량해전의 결과와 그 여파 7월 15일의 칠천량해전과 경남 고성 춘원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살아남은 배를 버리고 도망친 결과, 조선 수군은 주력 전함인 판옥선 60~70척이 격침되었고, 일본군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거북선 또한 3척이 격침되었습니다. * 춘원포 : 통영시 광도면 황리 또는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로 추정 당시 삼도수군이 거느린 판옥선의 숫자가 1백 척이 넘었었고, 위의 전투로 많은 전선이 격침되었으나 경상우수사 배설을 중심으로 원균의 명령을 거부하고 한산도 방면으로 제각기 후퇴한 잔여 전선들은 격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과 함께 여러 해전에서 활약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전사하였고, 사도첨사 김완은 포로로 붙잡혔으며, 최대 1만에 이르는 조선 수군이 전.. 2022. 6. 1.
[임진왜란82] 칠천량해전(2)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원균의 결단 |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렇지만 원균 휘하에서는 절망뿐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보여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무능한 행보로 많은 군사와 함대를 잃은 조선 수군은 매우 위축되었고, 지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원균은 칠천량에 함대를 정박시키고는 인근에 척후선을 보내거나 경계병을 세우지도 않고 술에 찌들어있을 뿐이었습니다. * 칠천량 : 경남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와 하청면 어온리 사이의 해협 그날 밤, 적선 2척이 아군 진영에 다가와 포를 쏘자 조선군 진영은 화들짝 놀라 혼란에 빠졌고, 제각기 도망치기에만 급급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7월 16일 5경(새벽 3시~5시)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 2022. 5. 29.
[임진왜란81] 한국사 최악의 해전! 칠천량해전(1) | 원균의 자업자득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지난 출정으로 적선 10척을 깨트렸으나 판옥선은 그보다 훨씬 많은 32척을 잃으면서 전임 통제사였던 이순신과는 180도 다른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원균은 이제 와서 부산포 출정이 불가하다며 말을 번복했고, 이순신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만든 운주당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퍼마시는 추태를 부렸습니다. 이에 화가 난 도원수 권율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원균에게 곤장을 쳤습니다. 그러자 원균은 분을 못 이겨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정에 나섰습니다. *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치고 출정을 강요하여 조선 수군을 사지(死地)로 밀어 넣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곤장을 친 이유는 원균이 지난 장계에서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면 부산포를 공격하여 적을 섬.. 2022. 3. 8.
[임진왜란80]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부산포 공격에 30만 육군이 필요하다는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 요청을 들어줄 순 없었고 대신 도원수 권율 휘하의 육군 5천여 명을 수군으로 배속시켜 주었습니다. 지난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인 시절에는 수군 진영의 병사들을 육군으로 배속시켰던 일이 있었으니 선조가 원균을 얼마나 총애했는지, 그리고 원균에 대한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원균은 일부 병력을 지원받게 되었고, 계속되는 출전 압박에 부산포로 출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1597년 6월 18일, 원균은 출정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적선 두 척을 불태웠을 뿐 연안에 늘어선 왜성에서의 포격과 일본 수군의 저항으로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습니다. 이를 당.. 2022. 2. 27.
[임진왜란79] 기문포 해전의 전말과 원균의 실상 | 기문포 해전의 전말 3월 9일에 벌어진 기문포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했으나 아군의 피해는 이보다 더 큰 14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개전 이래 처음으로 판옥선 1척이 격침되었습니다. 원균이 이 해전의 장계를 보내자 비변사는 전투 경과를 조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균의 비열한 행동이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참모 요시라 사이에서 일본군이 거제도 일대에서 나무를 해도 된다는 약조가 체결된 상태였고, 지난 해전에서 죽인 일본군이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비변사와 선조의 대화입니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원균이 바친 수급이 만약 나무를 베러 왕래하는 왜라면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인 왜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장을 독려하여 역전, 참획.. 2022. 2. 21.
[임진왜란78]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첫 출전! 기문포 해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친척이었던 안중홍이 찾아와 대화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원균이 "제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라고 말하자 안중홍은 "적을 무찔러서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세워야 진짜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지, 겨우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소?"라고 답하니 원균은 "멀리서 싸울 땐 편전을 쏘고 가까이서 싸울 땐 칼과 몽둥이를 쓰면 됩니다"(!)라고 받아치니 원균이 돌아간 이후 안중홍은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과 *기겁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라며 크게 탄식하였다. - 안방준 [은봉전서] * 조괄 : 중국 춘추전국시대 때 조나라 병사 45만을 잃은 지휘관 * 기겁 .. 2022. 2. 19.
[임진왜란77] 이순신의 2번째 백의종군과 정탁의 신구차 | 신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2월 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파직되었고, 이 무렵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받아 부산포 앞바다로 출정하여 적을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고 통제영인 한산도로 돌아온 이후 2월 26일, 조정에서 보낸 파발이 한산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한양으로 압송해갔으며, 후임으로는 전라병사 원균이 임명되었습니다. 이순신이 파직된 것은 아쉬운 일이나 이때 후임으로 원균이 아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임명되었다면 적어도 훗날의 기막힌 참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다루었던 요시라의 반간계로 조선 조정과 경상우병사 김응서, 도원수 권율은 미끼를 덥석 물었고, 선조는 일본군이 또다시 바다를 건너 상륙한 것을 이순신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 2022. 2. 16.
[임진왜란76] 강화 회담의 결렬과 이순신의 파직 1592년에 발발했던 임진왜란은 벌써 여러 해를 넘겨 1597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그러는 동안 일본군은 남해안 연안 곳곳에 왜성을 쌓아 혹시라도 진군해올지 모르는 조선 수군을 방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지난 임진년 때처럼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러 나서기 어려웠고, 일본군 역시 조선 수군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은 서로 대치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 강화 회담의 결렬 그러던 중 명나라 경락 송응창은 강화의 조건으로 크게 3가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 두 번째는 국경인이 넘겨준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송환할 것 세 번째는 전.. 2022. 2. 14.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