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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91] 직산 전투(2) 직산 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 | 직산 전투의 평가 [선조실록]에는 직산 전투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독 접반사(중국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던 임시 관직) 장운익이 아뢰기를, 직산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 나가 시살하며 한참 동안 교전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은 30여 급을 베었으며 해 부총(부총병 해생)과 양 참정(참장 양등산)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를 드니, 천안.. 2022. 6. 29.
[임진왜란90] 직산 전투(1) 일본군의 북상과 명군의 남하 | 일본군의 북상과 명군의 남하 황석산성을 함락시킨 일본 우군은 전주에서 일본 좌군과 합류한 후 승세를 타고 공주, 진천을 거쳐 북상하고 있었고, 그중 선봉대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직산(충남 천안시 직산읍)까지 당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다시 무서운 기세로 북상하자 일부 백성들은 피난을 갔으며, 조정에서는 또다시 파천(수도를 옮김)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에 선조는 평양에 머물던 명나라 경리 양호에게 여러 차례 출병을 간청하였고, 양호는 날랜 기병을 선발하여 부총병 해생을 비롯해 참장 양등산, 유격장 우백영과 파귀 등에게 군사 2천을 보내 남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유격장 파새가 정병 2,000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었습니다. | 직산 .. 2022. 6. 26.
[임진왜란89] 황석산성 전투(2) 백사림의 도주와 피로 물든 바위 | 백사림의 도주, 그리고 붕괴 조선군은 높고 험준한 곳을 따라 유리한 지형을 끼고 싸우고 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몰려드는 일본군 정예병을 당해낼 수 없었고, 전황이 점점 조선군에 불리해지자 전임 김해부사 백사림은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빼낸 뒤 자신도 성문을 열고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이 북문을 통해 벌떼같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불리했던 상황에서 성문까지 열리자 황석산성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 성문을 연 백사림과 그 가족이 살아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성문을 열어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일본군과의 밀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결국, 목숨을 걸고 싸우던 군민들은 쏟아지는 일본군을 보고 동요하여 가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 2022. 6. 22.
[임진왜란88] 황석산성 전투(1)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 | 일본군의 황석산성 포위 1597년 8월 16일,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일본 좌군에 의해 남원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같은 날,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가토 기요마사 등이 이끄는 일본 우군의 73,700명이 황석산성(경남 함양군)에 다다랐습니다. 황석산성은 해발 1,190m의 고지를 따라 쌓은 높이 3m, 둘레 8.9km의 산성이며,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도체찰사 이원익이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했던 곳이고, 이러한 이유로 일본군의 침입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안음현감 곽준은 이원익의 지시에 따라 안음(함양군 안의면), 거창, 함양의 군사와 백성, 그리고 무기와 식량을 모두 황석산성으로 모으고 인근에 청야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 육십령 : 경남 .. 2022. 6. 19.
[임진왜란87] 남원성전투(2) 전세의 불리함을 딛고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 남원성 전투 8월 13일, 일본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북문,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가 담당하기로 정한 후 소수의 병사를 성의 북문으로 보내 조명연합군을 도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총병 양원이 이복남에게 활로 적병을 제압할 것을 지시하니 전라병사 이복남은 "왜병은 조총으로 잡아야 한다" 라고 말하며 조총병으로 적병 여럿을 사살하였습니다. 이복남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몇 시간 후 일본군 조총부대가 성 앞으로 접근하자 조선군은 승자총통과 대완구로 비격진천뢰를 쏘아 적병을 격퇴했고, 양원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성 입구에 마름쇠를 깔아두었습니다. 8월 14일, 일본군은 남원성을 겹겹이 포위한 뒤 인근의 민가.. 2022. 6. 15.
[임진왜란86] 남원성 전투(1) 사나이 국은을 갚을 때가 이 날이 아닌가! | 일본군의 전라도 재침공 계획 지난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전 초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결정적 승리를 얻지 못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결국에는 남쪽으로 밀려난 원인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물리치지 못해 보급에 차질을 빚었던 것과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후 1597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 침략을 지시하였습니다. (정유재란) 이에 일본군은 14만의 병력을 좌군과 우군, 이렇게 둘로 나누어 우군은 총사령관을 모리 히데모토로 삼고, 임진왜란 때 2군과 3군 선봉장을 맡았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포함하여 총병력 73,.. 2022. 6. 12.
[임진왜란85]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던 중 8월 3일, *선전관이 선조의 명을 받고 이순신이 머물고 있던 진주에 내려왔습니다. * 선전관 : 왕의 측근에서 왕명 출납과 군무 처리 등을 맡던 무반직 이순신을 전과 같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고, 권준을 충청수사에 임명한다는 교서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잘 싸울 때 끌어내릴 때는 언제고 수군이 박살 나니까 인제 와서 다시 싸우라 하는 선조 [이충무공전서]에는 교서의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칠천량해전)에서 모두 없어졌으니, 이후 조선의 바.. 2022. 6. 8.
[임진왜란84] 절망에서 희망으로! 수군 재건에 나서는 이순신 7월 16일의 칠천량 해전과 뒤이은 원균의 실책으로 100척이 넘는 판옥선 중 절반 이상과 귀선(거북선) 3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던 노련한 군사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시절 숨죽이고 왜성에 틀어박힌 채 해전 자체를 두려워했던 일본군은 위의 해전으로 거칠 게 없어지자 천하의 요새 견내량을 넘어 한산도 통제영을 접수하고 인근을 노략질하였습니다. 이때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이 벌어진 이틀 후인 7월 18일, 조선 수군의 대패를 보고받자마자 권율과 향후 대책을 논의 후 9명의 군관과 6명의 병사와 함께 초계를 지나 단성, 진주, 곤양, 노량을 지나면서 거제 현령 안위, 경상우수사 배설 등의 패잔.. 2022.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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