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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75] 이몽학의 난(3) 반란은 진압하였으나 여파는 너무도 컸다 | 이몽학의 난의 진압 1596년 7월 6일에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은 홍산현, 임천현, 정산현, 청양현, 대흥군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나날이 세력을 불리고 있었으나 홍주목사 홍가신의 활약으로 홍주성 함락에 실패하였고, 관군의 토벌군이 잇따라 도착하면서 반란군의 숨통을 조여왔습니다. 거기다 이몽학을 베는 자에게 상을 내릴 것이라는 말이 전해지자 반란군은 급속히 붕괴되었고, 이몽학은 부하였던 김경창에게 목이 잘리면서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충청도 일대로 파견된 관리들은 자신을 도사, 선전관이라 지칭하며 이몽학의 난에 가담한 자들을 붙잡으러 왔다며 죄없는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거나 처형을 일삼는 일도 있었습니다. 역변이 일어난 .. 2022. 2. 12.
[임진왜란74] 이몽학의 난(2) 홍주목사 홍가신의 활약 | 빠른 속도로 번져가는 난의 불길 이몽학이 난을 일으켜 홍산과 임천(충남 부여군)을 단숨에 함락시키자 실의에 빠져있던 백성들은 앞다투어 이몽학의 무리에 가담하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7월 7일에 정산현(충남 청양군)에, 8일에는 청양현에 다다랐고, 이들을 막아야 할 정산현감 정대경과 청양현감 윤승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 도망가니 두 고을은 모두 반란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반란군은 기세를 이어 9일에는 대흥군(충남 예산군)을 공격했는데 대흥군수 이질수 역시 산중으로 도망가면서 대흥군 역시 손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의 위세는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이처럼 관군들은 반란군에 전혀 대항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여현감 허수겸과 서산군수 이충길은 쳐들어 온 반란군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2022. 2. 9.
[임진왜란73] 위기를 기회로! 이몽학의 난(1) | 점점 궁핍해지는 백성들의 삶 1596년 7월, 1592년 4월에 시작되었던 임진왜란은 종전도 아닌 휴전에 접어든 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징집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해 경작지가 많이 황폐해졌으니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조세는 매우 큰 부담이었습니다. 거기다 주둔 중인 명나라 군대를 먹여 살릴 식량도 마련해야 했던 반면, 명군은 자국의 땅까지 전장이 확대되지 않은 것에만 만족하고 싸울 뜻이 없었으며, 오히려 점령군 행세를 하며 소, 닭, 돼지 등의 가축을 마음대로 약탈하고 처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이를 두고 "명군은 참빗, 왜군은 얼레빗" 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일부 군대의 행패는 일본군이 자행했던 것 이상이었으며, 참빗은.. 2022. 2. 7.
[임진왜란72]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의 수륙 합동작전! 장문포 해전 제2차 당항포 해전 이후 조선ㆍ명나라, 일본 사이에는 교전다운 교전이 없었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는 강화 교섭이 이루어져 휴전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하루빨리 조선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싶었고, 명나라의 참전 목적은 전장이 명나라 영토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 생각한 나머지 전투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더이상의 피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조선 조정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명나라 대신 조선의 힘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했으며, 선조는 좌의정 윤두수를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윤두수는 영남과 호남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거제도의 일본군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022. 2. 3.
[임진왜란71]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출격! 제2차 당항포 해전 1593년 8월,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해상 퇴로를 차단함은 물론, 연합함대의 지휘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경상좌ㆍ우수영, 전라좌ㆍ우수영, 충청수영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를 떠나 한산도에 전진기지(통제영)를 세웠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보통의 경우 경상우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하였으므로 경상우수사 원균이 개전 초반 70척 혹은 100척의 함대를 수장시키지 않았더라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1594년 3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일본군의 동향을 살피던 중 당항포에 적선 30여 척이 정박해 있다 는 첩보를 받고 다시 한번 출정에 나섰습니다. 이는 이순신의 6차 출전이었으며, 동원된 전선.. 2022. 2. 1.
[임진왜란70] 논개의 희생과 송유진의 난 | 진주성 함락 이후 한편, 진주성 함락 이후 진주목사 서예원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고, 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습니다. 일본군은 진주대첩 때 김시민이 전사하지 않았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직접 지휘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서예원'을 '김시민'으로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7월 13일, 조선 조정은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군대로 하여금 진주성 구원을 지시했지만 이미 진주성은 함락된 지 열흘이 넘은 때였습니다. 이 무렵, 진주성 함락에 도취되어 술판을 벌이던 일본군은 기생을 불렀고, 그중 한 명이 왜장을 촉석루의 절벽으로 유인한 후 왜장을 끌어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녀가 바로 '논개'입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 2022. 1. 30.
[임진왜란69]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 | 난공불락 진주성의 함락 제2차 진주성 전투는 6천의 관군과 의병이 9만 3천의 일본군을 맞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 동안 격전을 펼쳤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은 행주대첩과 웅포해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데 이어 의병 활동으로 보급로가 계속 차단이 되자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 남해안 방면까지 밀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강화 회담 중이었음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대패했던 것을 설욕하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시 때문에 일어났던 이 전투의 결과는 매우 참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함락시키면 진주성 내의 사람은 물론이고 개나 고양이 할 것 없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2022. 1. 28.
[임진왜란68] 제2차 진주성 전투(3) 처절한 항쟁 6월 21일, 일본군 기병 200여 명이 진주성 동쪽에 모습을 드러내 정찰하였고, 뒤이어 일본군 부대가 공격하기에 앞서 진주성 주변의 해자를 메웠습니다. 당시 진주성의 조선군은 6천으로 9만 3천에 달하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성을 방비할 병력조차도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해자를 메우고 공격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도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6월 22일 아침, 일본군이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으나 조선군의 공격으로 일본군 30여 명이 죽자 잠시 물러났다가 밤에 2차례 공격을 해왔으나 순성장 황진(충청병사)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관들의 활약으로 모두 물리쳤습니다. 6월 23일, 해자를 메운 일본군은 각종 공성 무기와 수적 우세를 앞세워 낮에 3차례, 밤에 4차례 공격해왔으나 모두 격퇴하였습니다. 6월 24일에는..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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