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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5

[임진왜란41] 거북선의 뒤를 이을 비장의 무기 비격진천뢰! 제2차 경주성 전투 8월 20일, 경상좌병사 박진은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경주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매복해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6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후퇴하였습니다. 하지만 박진은 포기하지 않고 절치부심하며 경주성 탈환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군기시에 소속되어 있던 화포장 이장손이란 사람이 비격진천뢰라는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였고, 이 무기의 성능을 알아본 박진은 다음 전투에 도입하기로 결심합니다. * 군기시 : 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관청 | '비격진천뢰'란 무엇인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폭발할 때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 당시에는 화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발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혁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격진천뢰의.. 2021. 12. 1.
[임진왜란40] 천년의 수도 경주를 탈환하라! 1차 경주성 전투 | 경주성 함락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동래, 언양, 울산을 거쳐 경주로 향했습니다. 이때 경주성 방어의 책임자인 경주 부윤이 윤인함에서 변응성으로 교체되었는데 윤인함은 변응성이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주해 버렸습니다. 윤인함 : 인수인계는 모르겠고 일단 살고 보자 결국 경주성은 경주 부윤이 없는 상황에서 적을 맞이하게 되었고, 경주 부윤을 대신해서 판관 박의장과 장기현감 이수일이 군사와 백성 수천 명을 동원하여 경주성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일본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모두 도망갔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빨리 도망간 사람이나 나중에 도망간 사람이나 다를 것 없다 이렇게 경주성을 지키는 조선군은 아무도 없었고, 일본군이 무혈.. 2021. 11. 29.
[임진왜란39] 의병, 관군, 승병의 연합작전! 청주성 전투 1592년 6월 3일, 일본 제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에 의해 청주성이 함락되면서 청주 방어사 이옥은 도망쳤고, 청주성은 하치스카 이에마사라는 장수가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후 7월 15일, 승려 영규가 이끄는 승병 1천여 명이 청주성 탈환을 위해 청주성 서문 쪽에 있는 빙고현(모충동 고개)에 주둔하였고, 7월 29일에는 청주성이 점령된 후 연기군(현재 세종특별자치시)으로 피해있던 청주 방어사 이옥과 공주 목사 허욱의 군대 500여 명이 청주로 진출하여 영규의 승병과 합류하였습니다. 이들은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피해만 입고 탈환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이때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1,6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금산을 수복하려 했으나 *1차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이 전.. 2021. 11. 28.
[임진왜란38] 너희들은 포위됐다! 지례 전투 7월 17일, 거창으로 향하던 일본군이 우척현(우두령)에서 김면이 이끄는 의병에게 패하였고, 전주로 향하던 일본군 역시 권율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였습니다. 우척현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8 [임진왜란26] 영남 3대 의병장의 우척현 전투 | 일본 제6군의 전라도 공격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이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함경도로 진출할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들은 모두 전라도로 진출에 실패하여 지례현(지금의 경북 김천시)으로 후퇴하였고, 2개 부대의 병력이 합쳐 1,500여 명이었습니다. 7월 2.. 2021. 11. 27.
[임진왜란37] 빼앗긴 성을 돌려받으러 왔다! 영천성 전투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4월 22일에는 일본 제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에 의해 경북 영천이 점령당했습니다. 당시 영천성은 영천 군수 김윤국이 지켜야 했으나 일본군이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면서 성은 그대로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무혈입성하였습니다. | 영천성 탈환 작전과 창의정용군 일본군은 영천성에 1천여 명을 남겨둔 채 본대는 그대로 북진했는데 남아있던 일본군이 약탈을 자행하자 백성들은 분개하였고, 4월 27일, 영천 지역에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권응수를 대장으로 추대한 뒤 영천성 탈환을 위한 작전을 전개합니다. * 권응수 : 경북 영천 출신으로, 경상좌수사 박홍의 부하였으나 박홍이 전함을 자침시키고 도망치자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켰.. 2021. 11. 24.
[임진왜란36] 가토 기요마사의 여진족 공격과 지옥에 빠진 함경도 7월 17일~18일에 벌어진 해정창 전투에서 한극함이 이끄는 6진의 정예병력과 함경도 남병사 이영의 군대가 궤멸되면서 함경도를 수비할 병력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함경북도 회령에서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면서 함경도 전역은 가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토는 국경인과 국세필, 정말수 등에게 일부 지역의 통치를 맡긴 뒤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 여진족은 누구인가? 여진족은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때 고구려와 발해에 각각 복속되어 있었고,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거란족에 복속되어 있다가 거란족이 세운 나라인 요나라가 멸망할 때쯤 금나라를 세워 중국의 절반을 차지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몽골족에게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다시 복.. 2021. 11. 23.
[임진왜란35] 국경인의 반란과 임해군, 순화군의 악행 |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점령 7월 17일~18일의 해정창 전투에서 조선군이 궤멸당하자 더이상 자신을 막을 군대가 없다고 판단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은 다시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경성과 부령을 지나 7월 22일에는 임해군과 순화군이 피신해있는 회령 인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때 해정창 전투에서 패하고 경성으로 퇴각해있던 한극함은 가토 군대가 경성으로 오기 전에 국경을 넘어 여진족이 있는 부락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 국경인의 반란 7월 23일, 가토의 군대는 회령진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회령의 아전이었던 *국경인이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의 악행과 자신이 회령으로 유배된 것에 원한을 품고 백성들을 선동하여 조선 조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 여기서 국경인은 사람 이름이지 국경에 있는 사람을 일컫지.. 2021. 11. 22.
[임진왜란34] 가토 기요마사의 함경도 진출을 막아라! 해정창 전투 | 일본군의 분할 진격과 조선 왕자들의 근왕병 모집 일본군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평안도로 진군하였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황해도로 진출하여 1군을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제2군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군하였고, 모리 요시나리의 제4군은 강원도로 진출하여 2군을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선조가 있는 조정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갈 것에 대비하여 조정을 둘로 나누어 광해군에게 분조를 이끌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임해군을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 아직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지역에서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하였습니다. * 임해군(이진) : 세자 광해군의 친형으로,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 2021.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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