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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5

[임진왜란33] 조선의 힘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라! 제3차 평양성 전투 조선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일본군을 모두 막아내면서 전라도 수호에 성공하였고,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명나라 지원군까지 왔으니 이번 기회에 조선 조정은 평양성을 탈환하여 전황을 완전히 뒤집으려 했으나 순안군수 황원의 오인 보고와 명나라 장군들의 공명심 때문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에 말려든 조명연합군은 첫 번째 패전을 기록하였습니다. 한편, 제2차 평양성 전투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조승훈은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고, 조선 조정은 평양에 있는 고니시의 군대가 지난 전투에서 퇴각하는 조명연합군을 추격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러 차례의 전투로 인해 전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 판단하여 그동안 모은 병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조선군만의 힘으로 평양성을 다시 탈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임중량, 윤봉, 그리고 .. 2021. 11. 20.
[임진왜란32] 조명연합군의 첫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 |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실패 육지에서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고, 바다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에서,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안골포에서 패퇴하면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의 전라도 공격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category/%EC%9E%84%EC%A7%84%EC%99%9C%EB%9E%80/%EC%9D%BC%EB%B3%B8%EA%B5%B0%EC%9D%98%20%EC%A0%84%EB%9D%BC%EB%8F%84%20%EA%B3%B5%EA%B2%A9 이로써 평양까지 진출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은 육지에서는 관군과 의병의.. 2021. 11. 19.
[임진왜란31] 부산 인근까지 다다른 조선 수군! 이순신의 3차 출정 성과 | 이순신의 3차 출정 성과 7월 6일에 다시 한번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3차 출정에 나선 조선 수군은 7월 8일에 한산도에서, 7월 10일에 안골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2번의 해전을 통해 적선 총 70여 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부산 인근까지 제해권을 넓혔고, 일본 수군은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부산조차도 머지않아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으로 전투를 총괄한 이순신은 정헌대부(정2품)으로,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은 가의대부(종2품)으로 승진하였습니다. * 7척밖에 없던 원균에게 25척을 이끈 이억기와 같은 포상을 한 점은 아쉽습니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탈출 시도 한편, 한산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2021. 11. 18.
[임진왜란30] 우수한 무기와 탁월한 전략! 안골포 해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73척의 함대를 물리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한산도 대첩) * 73척 중 47척 격침, 12척 나포, 14척은 퇴각 이는 지금까지 치렀던 해전보다 훨씬 더 큰 전과를 이룬 해전이었기에 장수와 병사들 모두 매우 기뻐했고, 승세를 타고 가덕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고 역풍도 크게 불어서 인근에 정박해 있었는데 승리의 여운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안골포에 적선이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 안골포 : 안쪽이 깊은 산골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안골포라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이제 부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2021. 11. 17.
[임진왜란29] 급변하는 전황! 한산도 대첩의 결과와 평가 | 한산도 대첩의 결과 한산도 대첩으로 조선 수군은 부산을 제외한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하였으며, 이 시기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 제6군의 전라도 진출마저 좌절되면서 수륙 양면에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 웅치, 이치, 안덕원, 금산 전투를 치르면서 일본 제6군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곡창지대였던 호남 지방이 보존되면서 전라도가 병참기지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획했던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물거품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을 만나기만 하면 패배하는 일본 수군을 보고 "더는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고 해안에 성을 쌓아 방어에 주력하라" 라는 해전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니 당시 일본.. 2021. 11. 14.
[임진왜란27] 제해권을 장악하라! 이순신의 3차 출정 | 진군에 제동이 걸린 일본군 1592년 6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를 공격하면서 이치, 웅치, 안덕원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이 펼쳐질 무렵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는 남쪽 바다에서도 전란의 흐름을 바꿀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그동안 옥포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합포ㆍ적진포ㆍ사천ㆍ당포ㆍ당항포ㆍ율포에서 적선을 일방적으로 격침시키며 남해의 제해권을 넓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서해로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안도로 진군해있는 일본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제때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가 참전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최후방어선이자 선조가 있는 의주를 목전에 두고도 더는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조선 수군의.. 2021. 11. 12.
[임진왜란26] 영남 3대 의병장의 우척현 전투 | 일본 제6군의 전라도 공격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제1군이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2군이 함경도로 진출할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제6군은 전라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곽재우의 의병에게 정암진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후 이치와 웅치 고개를 넘어서 전주성으로 향하려 했으나 이치는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가로막혀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웅치는 의병장 황박과 정담, 이복남의 관군이 뚫리긴 했으나 웅치에서 살아남은 조선군과 황진의 활약으로 안덕원에서 패배하면서 금산으로 퇴각했고, 거기다 고경명의 의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금산성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고바야카와의 군대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라도 공격.. 2021. 11. 10.
[임진왜란24] 이치 전투! 일본군의 전주성 진출을 차단하라 7월 7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웅치(곰티재)를 넘은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본대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하나의 고개인 *이치(배티재)로 향했습니다. * 이치 : 현재의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남 금산군 진산면 묵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 얼마 후 일본군이 이치로 오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광주목사 권율은 고갯길의 후방에는 화포를 설치하였고, 전방에는 목책을 쌓는 한편, 적이 오는 길목에는 *마름쇠를 깔아두어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 마름쇠 : 적의 침투를 저지 또는 지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방어용 무기이며, 보병이나 말이 밟을 시 치명상을 줄 수 있다. 이때 이치를 수비하던 조선군은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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