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67]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2)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으로 휴전 기간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일본군은 6월 15일에 함안, 16일에 반성, 18일에는 의령까지 점령하면서 점차 진주성 쪽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군대의 규모만 해도 9만 3천에 이르렀으며, 이는 이순신과 대치 중인 일본 수군과 부산 등의 전략적 거점을 수비할 일부 일본군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진주성에 쏟아부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 4군 선봉장 모리 요시나리의 휘하 시마즈 요시히로, 6군 선봉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7군 선봉장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한 모리 히데모토, 8군 선봉장이자 일본군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훗날 세키가하라 전..
2022. 1. 22.
[임진왜란63]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이유와 그 여파
|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이유 3천의 조선군이 3만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우선, 행주산성을 전장으로 꼽았던 것을 첫 번째로 들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은 비록 성벽은 낮았지만,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 창릉천이 흘러 북쪽과 서쪽 방면의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고, 조방장 조경이 전투 직전 성의 내성과 외성에 목책을 둘러 방어력을 높였습니다. 두 번째로, 신기전, 변이중의 화차, 이장손의 비격진천뢰, 이순신의 천자총통(전투 막바지에 화살 지원 포함) 등 당대의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병력의 열세를 화력으로 극복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지휘관인 권율이 병사들에게 재주머니를 착용하게 하여 일본군과의 근접전에 대비한 점과 강한 통솔력,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2022.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