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4

[임진왜란67]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2)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으로 휴전 기간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일본군은 6월 15일에 함안, 16일에 반성, 18일에는 의령까지 점령하면서 점차 진주성 쪽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군대의 규모만 해도 9만 3천에 이르렀으며, 이는 이순신과 대치 중인 일본 수군과 부산 등의 전략적 거점을 수비할 일부 일본군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진주성에 쏟아부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3군 선봉장 구로다 나가마사, 4군 선봉장 모리 요시나리의 휘하 시마즈 요시히로, 6군 선봉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7군 선봉장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한 모리 히데모토, 8군 선봉장이자 일본군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 훗날 세키가하라 전.. 2022. 1. 22.
[임진왜란66] 제2차 진주성 전투(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어린 분노 | 한양 탈환 1593년 4월 18일, 일본군이 수도 한양에서 철수한 후 남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20일 만에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후 거의 1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옥포해전~웅포해전으로 이어지는 이순신 및 조선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전란 초기 패배와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던 관군이 의병과 합심하여 일본군에 결코 쉽게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대군이 남아있었고,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화력을 맛보았던 경험 때문에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은 당시 한양에 있던 대부분의 지휘부가 모여서 공격했지만,.. 2022. 1. 19.
[임진왜란65] 조선 수군 최초의 상륙작전! 웅포해전(2) 2월 10일부터 시작된 조선 수군의 4차례의 웅포 공격으로 5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했으나 웅포에는 아직 훨씬 많은 수의 적선과 병력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순신이 기다리던 조선 육군의 지원이 어렵게 되니 조선 수군이 독자적으로 웅포의 왜성과 포구에서 바다로 나올 생각이 없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2월 22일, 임진왜란 최초로 상륙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 수군이 보유하고 있던 성응지의 의병과 심혜, 의승이 이끄는 승병 1,700여 명을 동원하여 그중 1,100명을 남양리(안골포)에, 남은 600명을 제포(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각각 상륙시켰고, 경쾌선을 15척씩 조직하여 차례로 웅포로 진격한 후 공격하고 빠지길 반복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3.. 2022. 1. 17.
[임진왜란64] 나오지 않는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웅포해전(1)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의 제4차 평양성 전투로 평양성이 탈환되자 일본군의 기세가 꺾였다고 판단한 조선 조정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다시 한번 부산을 공격하여 일본군이 바다로 달아날 길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순신은 명을 받들어 2월 2일에 42척을 이끌고 전라좌수영을 떠나 2월 7일에는 *견내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2월 8일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선 40척과 합류하였습니다. * 견내량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의 좁은 해협 이렇게 다시 한번 연합함대를 구성한 조선 수군은 칠천도를 지나 부산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날이 풀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씁니다. 2월 10일, 조선 수군은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웅포에 .. 2022. 1. 15.
[임진왜란63]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이유와 그 여파 | 행주대첩에서 승리한 이유 3천의 조선군이 3만의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꼽자면 우선, 행주산성을 전장으로 꼽았던 것을 첫 번째로 들 수 있습니다. 행주산성은 비록 성벽은 낮았지만,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 창릉천이 흘러 북쪽과 서쪽 방면의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고, 조방장 조경이 전투 직전 성의 내성과 외성에 목책을 둘러 방어력을 높였습니다. 두 번째로, 신기전, 변이중의 화차, 이장손의 비격진천뢰, 이순신의 천자총통(전투 막바지에 화살 지원 포함) 등 당대의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병력의 열세를 화력으로 극복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지휘관인 권율이 병사들에게 재주머니를 착용하게 하여 일본군과의 근접전에 대비한 점과 강한 통솔력, 그리고 상황에 맞는 적절한.. 2022. 1. 12.
[임진왜란62] 행주대첩(3) 계속되는 공격과 예상치 못한 변수 | 일본군 6진 모리 히데모토의 공격 조선군은 일본군 1진부터 5진까지의 계속된 공격을 잘 방어하였으나 쉴 틈도 없이 6진의 모리 히데모토가 출진하였습니다. * 1진 : 고니시 유키나가, 2진 : 이시다 미츠나리, 3진 : 구로다 나가마사, 4진 : 우키타 히데이에, 5진 : 깃카와 히로이에 모리 히데모토의 일본군은 처영이 이끄는 승병과 육박전을 전개하였는데 조선군은 계속된 전투로 점점 지쳐가는 상태였습니다. 반면에, 단병접전에는 도가 튼 일본군이었으나 승병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재 주머니를 얼굴에 뿌리자 앞을 볼 수가 없었고, 그사이에 목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공격이 지지부진해져 갈수록 피해가 늘어가고, 더 치고 나가지도 못하자 후퇴를 명하였습니다. | 일본군 7진 고바야카와 다카카.. 2022. 1. 10.
[임진왜란61] 행주대첩(2) 병력의 열세를 화력으로 극복하라! 일본군은 평양에서 한양으로 남하하는 명나라군을 벽제관에서 물리친 후 남쪽에서 한양으로 북상하던 조선군을 공격하기 위해 3만여 명의 병력을 7진으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당시 행주산성에는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이끄는 관군, 김천일의 의병, 처영의 승병을 합하여 3천여 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593년 2월 12일, 묘시(오전 5시~7시)에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1진을 맡아 성으로 접근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몰려오자 조선군은 조총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활을 쏘고, 변이중 화차와 신기전, 비격진천뢰와 석포까지 쏘아대니 고니시는 성벽에 접근도 못한 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습니다. 1진이 후퇴하자 일본군은 2진을 맡은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대를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 2022. 1. 8.
[임진왜란60] 행주대첩(1) 조그만 산성으로 몰려드는 초호화군단 1592년 12월,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경기도 오산의 독산성에서 승리한 후 북상을 지속했고, 1593년 1월에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기세를 이어 한양을 되찾기 위해 남하하였습니다. 독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96 [임진왜란54] 쌀로 말을 씻겨라! 독산성 전투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한 권율은 공을 인정받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치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 historicalhistory.tistory.com 이후 권율은 전라도병사 선거이에게 4천 군사로 금천(서울특별시 금천구)을 지키게 했으며, 소모사 변이중.. 2022. 1. 6.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