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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59] 과도한 자신감, 성급한 진격의 결과! 벽제관 전투(2) 1월 25일, *여석령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의 정탐병이 일본군의 정탐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전공을 세울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벽제관으로 진군하였습니다. * 여석령 :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 벽제관 :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해있으며,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 전 날 머물던 역관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병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고, 그 틈을 노려 매복해있던 일본군이 일제히 조총을 발사하였습니다. 마치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기마병이 늪지대에 빠진 것이 연상되는 장면입니다. 명군은 그제서야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으나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된 후였고, 평양성에서 불랑기포를.. 2022. 1. 4.
[임진왜란58]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벽제관 전투(1) 1593년 1월 9일, 3차례의 탈환 시도 끝에 평양성을 되찾은 조명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1월 10일에는 개성까지 진격합니다. 고구려의 수도에 이어 고려의 수도까지! 한편,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4차 평양성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안전한 철수를 보장하는 협상을 맺고도 조명연합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황해도에 진출해있던 일본 제3군 선봉장인 구로다 나가마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한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성 전투의 소식을 듣게 된 한양의 일본군은 명나라 군대의 대규모 참전과 압도적인 화력에 겁을 먹고 남쪽으로 후퇴하자는 의견이 대다수였으나 일본 제6군 선봉장이자 전라도 진출 임무를 실패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여기서 더 이상 물러난다면 적군의 기세는 더 높아질 것이고 아군의 기세.. 2022. 1. 2.
[임진왜란57] 승부는 삼세판! 성주성 전투 임진왜란 초반, 고니시의 1군에 의해 성주가 함락된 이후 성주는 하시바 히데카츠의 9군이 점령중이었다가 일본 제7군 모리 데루모토 휘하 장수인 가쓰라 모토쓰나의 1만 병력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권응수 장군이 영천성을 탈환하였고, 이어서 경상좌병사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앞세워 경주성을 탈환하면서 인근의 일본군 중 일부가 성주로 옮겨가 성주에는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권응수 장군의 영천성 전투와 경상좌병사 박진의 1ㆍ2차 경주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영천성 전투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9 [임진왜란37] 빼앗긴 성을 돌려받으러 왔다! 영천성 전투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4월 22일에는 일본 제2.. 2022. 1. 1.
[임진왜란56] 제4차 평양성 전투(2) 막다른 길에 몰린 일본군의 최후는? 맹렬한 화포 공격으로 평양성의 외성을 함락시킨 조명연합군은 물밀듯이 중성으로 치고들어갔고, 일본군은 계속 밀려나 풍월정에 토굴을 쌓아 올려 결사항전하였습니다. 조명연합군의 총지휘관이자 명나라 제독인 이여송은 이곳을 집중공격했지만 일본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막혀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여송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했고, 고니시는 계속 방어하다간 죽거나 포로로 잡힐 것을 염려하여 협상에 응했습니다. 협상의 내용은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물러나는 대신 조명연합군이 이들을 추격하지 않고 안전하게 보내줄 것을 보장하고 평양성의 포위를 풀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군은 협상의 소식을 듣고 격분했으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임진왜란의 일본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고 싶었으나 지휘권이 명나라에.. 2021. 12. 28.
[임진왜란55] 조명연합군의 집중 포화! 제4차 평양성 전투(1) 임진왜란 초반, 물밀 듯이 진군해오는 일본군에 의해 의주까지 밀려난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자국의 국경까지 위협을 받자 요동 부총병 조승훈을 원군으로 파병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원수 김명원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에 실패하였고, 조승훈은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요동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제2차 평양성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74 [임진왜란32] 조명연합군의 첫 전투! 제2차 평양성 전투 |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실패 육지에서는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가 전라도 점령에 실패했고, 바다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도에서, 구키.. 2021. 12. 26.
[임진왜란54] 쌀로 말을 씻겨라! 독산성 전투 이치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한 권율은 공을 인정받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치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 게시물을 참고해주세요.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6 [임진왜란24] 이치 전투! 일본군의 전주성 진출을 차단하라 7월 7일에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웅치(곰티재)를 넘은 일본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전주성으로 향했고, 본대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는 또 하 historicalhistory.tistory.com https://historicalhistory.tistory.com/67 [임진왜란25] 이치 전투의 결과와 영향 이치 전투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승리.. 2021. 12. 23.
[임진왜란53] 진주대첩(3) 일본군을 물리친 모쿠소 호간 10월 9일, 10월 6일부터 시작된 진주성 공방전은 며칠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일본군은 진주성 외곽에 있는 의병이 배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진주성 함락에 매번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병력의 우세함을 앞세워 부대를 나누어서 의병을 향한 공격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전력을 집중시키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진주성 외곽의 의병들은 의병장 김준민 등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습니다. 이에 의병과 진주성의 군사들은 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에 사기가 한껏 올라갔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전략이 먹혀들지 않자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방패를 앞세워 피해를 최소화한 후 그 뒤에서 조총병이 사격하는 동안 보병들이 접근하는 전략을 썼으나 이 역시 진주.. 2021. 12. 20.
[임진왜란52] 진주대첩(2) 계속되는 혈투 |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분투 10월 4일, 일본군 선발대 1만여 명이 진주성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진주성을 공격하지 않고 진주성 외곽에서 성을 지원하던 경상우병사 유숭인의 군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유숭인의 군대는 수백에 불과했기 때문에 병력의 차이가 너무나 현저했고, 모두 열심히 싸웠지만, 일본군의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유숭인 역시 휘하의 사천현감 정득열, 권관 주대청 등과 함께 전사했고, 진주성의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사기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진주성의 총책임자였던 진주목사 김시민은 성 밖의 아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도와줄 수가 없었고, 이는 유숭인의 입성을 막았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10월 6일, 일본군 본대가 진주성에 도착.. 2021.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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